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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 폴랸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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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드미트리 폴랸스키는 소련의 정치인 및 외교관으로, 우크라이나 루한스크주 출생이다. 1939년 하르코프 농업대학을 졸업하고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여 콤소몰, 콜호스, 붉은 군대 복무 등 다양한 경력을 거쳤다. 1945년 당 중앙위원회 인사부 조직 책임자를 시작으로 크림주, 오렌부르크주, 크라스노다르 지방 당 제1서기를 역임했으며, 1958년부터 1962년까지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을 지냈다. 1960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부수상으로 활동하며 알렉세이 코시긴을 보좌했으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집권 이후 실각하여 농업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76년 주일 대사로 임명되었으나, 고압적인 외교 스타일로 "공갈 대사"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재임 중 여러 외교적 문제로 인해 일소 관계를 악화시켰다. 1982년 주 노르웨이 대사로 전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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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 폴랸스키
기본 정보
1972년의 폴랸스키
이름드미트리 스테파노비치 폴랸스키
원어 이름Дми́трий Степа́нович Поля́нский (러시아어)
출생일1917년 10월 25일 (구 11월 7일)
출생지러시아 제국 슬로비아노세르브스크 (현재 우크라이나)
사망일2001년 10월 8일
사망지러시아 모스크바
국적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인
소속 정당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직책
소비에트 연방 각료 회의 제1부의장재임 기간: 1965년 10월 2일 – 1973년 2월 2일
각료 회의 의장알렉세이 코시긴
이전키릴 마주로프
이후니콜라이 티호노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 회의 의장재임 기간: 1958년 3월 31일 – 1962년 11월 23일
이전프로을 코즐로프
이후겐나디 보로노프
정치국 정회원재임 기간: 1960년 5월 4일 – 1976년 3월 5일
정치국 후보위원재임 기간: 1958년 6월 18일 – 1960년 5월 4일

2. 초기 생애 및 경력

1917년 러시아 공화국 예카테리노슬라프 현(현재 우크라이나 루한스크주)에서 태어났다.[1] 1930년 콤소몰 활동에 참가했으며, 1932년부터 콜호스(집단 농장)에서 일했다.[1] 1939년 하르코프 농업대학을 졸업하고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여 하르코프주 콤소몰 부장이 되었다.[1] 1940년 붉은 군대에 입대하여 1942년 제대 후 알타이 지방에서 당 활동을 했다.[1]

2. 1. 출생 및 성장

1917년 러시아 공화국 예카테리노슬라프 현 (현재 우크라이나 루한스크주) 솔로브야노세르부스크 마을의 농가에서 태어났다.[1] 1930년 콤소몰 활동에 참가했으며,[1] 1932년부터 콜호스(집단 농장)에서 일했다.[1] 1939년 하르코프 농업대학을 졸업하고,[1] 같은 해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여 하르코프주 콤소몰 부장이 되었다.[1] 1940년 붉은 군대에 입대하여,[1] 1942년 제대 후 알타이 지방에서 호로셴스코예 기계화 트랙터 스테이션(MTS) 정치 책임자나 카라스쿠스크 지구 당 제1서기 등 당 활동을 했다.[1]

2. 2. 콤소몰 및 콜호스 활동

1930년 콤소몰 활동에 참가했으며, 1932년부터 콜호스 (집단 농장)에서 일했다. 1939년 하르코프 농업대학을 졸업하고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여 하르코프주 콤소몰 부장이 되었다.

2. 3. 군 복무

1940년 붉은 군대에 입대했다.[1] 1942년 병역을 마치고 알타이 지방 호로셴스코예 기계화 트랙터 스테이션(MTS) 정치 책임자, 카라스쿠스크 지구 당 제1서기 등 당 활동을 했다.[1]

3. 정치 경력

드미트리 폴랸스키는 1945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인사부 조직 책임자가 되면서 중앙 정치 무대에 진출했다. 1949년 크림주 당 제2서기를 거쳐 1952년 동 제1서기를 역임했으며, 크림반도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이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5년 오렌부르크주 당 제1서기, 1957년 크라스노다르 지방 당 제1서기를 역임했다. 1956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다. 1958년부터 1962년까지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수상)을 역임했다.

1960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알렉세이 코시긴, 니콜라이 포드고르니와 함께 당 간부회원(1966년부터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폴랸스키는 정치국원 중 최연소였다.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부수상)을 역임하며 알렉세이 코시긴 수상의 보좌를 담당했고, 코시긴의 뒤를 이을 유력한 수상 후보로 거론되었다. 1964년 니키타 흐루쇼프가 실각했을 때 흐루쇼프의 농업 정책을 비판했다. 1965년 제1부수상이 되었지만,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권력을 집중하는 가운데 실각하여 1973년 농업부 장관이 되었다. 이는 농업이 소련 경제의 아킬레스건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강등 인사였다.

3. 1. 중앙 정치 무대 진출

1945년 중앙위원회 인사부 조직 책임자가 되었다. 1949년 크림주 당 제2서기를 거쳐 1952년 동 제1서기를 역임했다. 크림반도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이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5년 오렌부르크주 당 제1서기, 1957년 크라스노다르 지방 당 제1서기를 역임했다. 1956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다. 1958년부터 1962년까지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수상)을 역임했다.

3. 2. 최고 지도부 진입과 몰락

1960년 6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알렉세이 코시긴, 니콜라이 포드고르니와 함께 당 간부회원(1966년부터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폴랸스키는 정치국원 중 최연소였다.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부수상)을 역임하며 알렉세이 코시긴 수상의 보좌를 담당했고, 코시긴의 뒤를 이을 유력한 수상 후보로 거론되었다. 1964년 니키타 흐루쇼프가 실각했을 때 흐루쇼프의 농업 정책을 비판했다. 1965년 10월 제1부수상이 되었지만,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권력을 집중하는 가운데 실각하여, 1973년 2월 농업부 장관이 되었다. 이는 농업이 소련 경제의 아킬레스건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강등 인사 외에는 다른 의미가 없었다.

4. 주일 대사 시절 (1976-1982)

1976년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농업 부진의 책임을 추궁당해 정치국원과 농업상에서 해임된 후 주일 대사로 임명되었다. 폴랸스키의 일본 부임 직후 벨렌코 중위 망명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5년간 일본에 있으면서 200해리 어업 문제, 중일 평화 우호 조약 체결,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폴란드 계엄령 선포 및 독립 자율 관리 노동조합 '연대'(Solidarność) 탄압 등 여러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소련 관계(일소 관계)가 냉각되었다. 폴랸스키는 외교 석상에서 시종 고압적인 협상 태도를 보여 "공갈 대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는 소련에 강경한 입장이었던 호겐 신사쿠 외무 사무차관과 파티장에서 격론을 벌이거나, 일본 국회의원과 소련 대사관에서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임기를 마치고 출국 전 작별 파티에 미국, 영국, 프랑스 3개국 주일 외교관이 전혀 참석하지 않는 등 일화가 끊이지 않았다.

4. 1. 임명 배경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권력을 집중하는 가운데 폴랸스키는 실각하여, 1973년 2월 농업부 장관이 되었다. 이는 농업이 소련 경제의 아킬레스건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강등 인사 외에는 다른 의미가 없었다.

4. 2. '공갈 대사'

1976년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농업 부진의 책임을 추궁당해 정치국원과 농업상에서 해임된 후 주일 대사로 임명되었다. 일본 부임 직후 벨렌코 중위 망명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5년간 재임하면서 200해리 어업 문제, 중일 평화 우호 조약 체결,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폴란드 계엄령 선포 및 독립 자율 관리 노동조합 '연대'(Solidarność) 탄압 등 여러 문제로 인해 일본-소련 관계(일소 관계)가 냉각되었다. 폴랸스키는 외교 석상에서 시종일관 고압적인 협상 태도를 보여 '공갈 대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대소련 강경파로 알려진 호겐 신사쿠 외무 사무차관과 파티장에서 격론을 벌이거나, 일본 국회의원과 소련 대사관에서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임기 만료 후 출국 전 작별 파티에 미국, 영국, 프랑스 주일 외교관이 일절 참석하지 않는 등 일화가 끊이지 않았다.

4. 3. 한일 관계에 미친 영향

1976년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농업 부진의 책임을 추궁당해 정치국원과 농업상에서 해임된 후 주일 대사로 임명되었다. 폴랸스키의 일본 부임 직후 벨렌코 중위 망명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5년간 일본에 있으면서 200해리 어업 문제, 중일 평화 우호 조약 체결,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폴란드 계엄령 선포 및 독립 자율 관리 노동조합 '연대'(Solidarność) 탄압 등 여러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소련 관계는 냉각되었다. 폴랸스키는 외교 석상에서 시종 고압적인 협상 태도를 보여 "공갈 대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는 소련에 강경한 입장이었던 호겐 신사쿠 외무 사무차관과 파티장에서 격론을 벌이거나, 일본 국회의원과 소련 대사관에서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임기를 마치고 출국 전 작별 파티에 미국, 영국, 프랑스 3개국 주일 외교관이 전혀 참석하지 않는 등 일화가 끊이지 않았다. 일본에 대한 외교를 잘 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재임 중 당 중앙 위원에서도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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